서울의 전통 성곽과 사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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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

원래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는 동대문은 서울 도성의 바로 동쪽 관문으로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성을 쌓기로 결정하면서 함께 착공하여 이듬해 완공되었습니다.

태조 5년(1396년) 9월에 건립된 지 590년이 되었는데, 여러 차례의 보수와 개축을 거쳐 가장 원래의 원형건물은 그대로 보존되어 정부로부터 보물 제1호로 지정받았습니다.

지금의 동대문은 대원군 때인 고종 6년에 다시 개수하여 지어진 것으로, 원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었다가 시대에 따라 동대문(東大門)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가운데 세워진 홍예문 중 정면 5칸, 측면 2칸의 문루를 갖춘 2층짜리 건물로, 서울 8대 성문 중 유일하게 외부부터 보호벽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숭례문
숭례문

숭례문

최초의 숭례문은 조선 태조 5년(1396년)에 세워졌으며, 1398년 2월에 증축이 완료되었습니다.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시대 한성 도성의 사대문 중 남쪽에 있던 정문으로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불렀습니다. 1448년에 확대 재보수되어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지만 파급은 없었습니다.

처음 축조되었을 때 성문은 양쪽 성벽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1908년에 도로를 넓히기 위해 성벽을 허물고 외딴 섬 같은 성문만 남았습니다. 2006년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하여 1962년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건물은 상하 2층 각 5칸, 측면 2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내부 아래층은 아치 위 중앙의 방에만 우물마루가 있고, 나머지 아래층 방의 바닥은 진흙으로 되어 있고, 위층은 판지를 깔아놓았습니다.

숭례문 현판의 글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지봉류설>에는 양녕대군이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문의 현판은 모두 좌우 횡으로 되어 있는데 숭례문만 상하직식입니다.

숭례 두 글자는 불꽃이라는 뜻으로 경복궁과 마주보고 있는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붙여졌다고 합니다. 전형적인 다포식 건축물의 남대문은 우리나라 현존하는 성문건축물 중 가장 큰 규모이며, 튼튼한 목조구조의 모범은 우리나라 건축물입니다.역사상 중요한 건축물 중 하나입니다.

서울시는 1997년 초 성문 경관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 조명을 설치했습니다. 서울 중구청은 2005년 10월부터 주변도로 보수공사를 진행하면서 홍예문 입구 등 5곳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조선 세종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하층석 기단과 지대석(지반석), 박석, 문축 등을 발굴하였습니다.

1907년 남대문을 관통하는 전철선로공사 때 성문 주변에 1m 정도 쌓여있는 흙 속에서 과거 흙으로 완전히 덮여있던 초석과 박석 등이 잘 보입니다. 중구청은 시민 문이 바닥보다 더 잘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1.6m 낮은 이 구조물들은 중앙통로를 굴착하면서 남긴 모습들을 일부 보존하고 관람시설을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숭례문은 2008년 2월 10일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5년 3개월간의 복원공사를 거쳐 2013년 재개관하여 2013년 5월 1일 선조들에게 복원을 알리는 ‘고유제’를 지냅니다.

숭례문 복원공사에는 충남 태안의 안면송이 주로 사용됐으며, 안면송은 고려시대부터 궁궐이나 배를 만드는 데 사용돼 왔으며, 이번에 숭례문의 서까래와 기둥, 지붕 등에 사용됐습니다.

북악산 숙정문

숙정문은 북한 산동쪽 가장자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성곽의 북대문을 일컫는 말로 ‘장엄숙숙정평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조 5년(서원 1396년)에 완공된 숙정문은 지금보다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가 연산군 10년(서원 1504년)에 성곽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장소로 옮겨졌습니다.

숙정문은 원래 백성들의 출입이 아니라 서울의 성곽을 보완하기 위한 동남서북 4대문의 격식을 갖추어 유사시 대피용으로 건립되었는데요.

평소 대문이 깊숙이 잠겨 있어 문을 통과하는 큰길은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1976년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할 때 지은 문루로, ‘숙정문’이라는 글이 걸려있습니다.큰 글씨로 된 현판입니다.

광화문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자 궁궐의 정문입니다.

조선법궁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왕의 출입문으로서 다른 궁궐의 정문에 비해 그 규모와 격식이 웅장하고 화려합니다. 광화문 성벽의 동서 끝은 각각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으로 되어있으며, 조선의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궐문형태의 궁문이 있습니다.

광화문은 석조 3개의 홍예문을 갖춘 이중문루, 중앙 홍예문은 왕전용도로, 좌우에는 왕세자 및 신하들의 출입문, 그리고 과거의 문루 내부에는 시간을 알리는 동종건물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광화문을 포함한 성문형태로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법궁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궁궐들도 낮은 성문을 만들었지만, 경복궁의 광화문은 석조고대성문뿐만 아니라 내부에 흥례문이 따로 있어 마치 성곽의 문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독특한 격식을 갖추고 법궁의 정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복궁 창건 초기 광화문은 특별한 명칭 없이 ‘오문’으로 불리다가 태조 3년(1395) 정도전이 ‘정문’으로 개칭하였고, 세종 8년(1426) 경복궁을 정비하면서 집현전 학자들이 ‘광화문’이라는 이름을 따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지으면서 광화문은 한때 궁궐 동문인 건춘문의 북쪽으로 이건되었고, 6·25전쟁 때 포격으로 문루가 훼손되고 석조부분은 탄흔이 가득 남았습니다.

1968년 박정희 정권 때 파괴된 문루를 재건하고 광화문을 제자리 근처로 옮긴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철근혼토만을 사용하여 재건하였고, 경복궁 중심축에 맞추지 않고 당시 중앙청으로 사용하던 옛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원래 위치와 3.5도 정도의 오차치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위치도 14.5m 정도 뒤로 물러났습니다.

잃어버린 광화문을 되찾기 위해, 2006매년 철거·재건축 공사를 시작하여 3년 8개월 만에 2010년 8월 15일에 완공하였습니다.

밑바닥의 중후한 기단은 화강암으로 조성되었고, 그 위에 2층의 문루가 자리하고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궁궐 정문의 위엄을 보여줍니다.

기단 3개의 아치형 출입구는 경복궁이 조선법궁으로 불리고 있는 기품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석조기단에는 흙을 이용하여 벽돌처럼 구운 전돌석을 낮은 담장을 만들고, 윗부분에 장식한 팔괘무늬는 조선시대 궁궐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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